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THE iDOLM@STER (문단 편집) === 2001년 ~ 2009년 === || [[파일:external/www.project-imas.com/IdolGameArcade02.jpg|width=100%]] || [[파일:imas history-1.jpg|width=100%]] || [[파일:imas history-2.jpg|width=100%]] || [[파일:imas history-3.jpg|width=100%]] || 기획의 발단은 당시 남코가 개발했던 '드래곤 크로니클'이라는 아케이드 기기의 컨버전 역할로, 해당 게임이 부진할 시 이를 대체할 차기 게임이자 기기의 재활용역으로 개발된 것이다. 당시는 오락실 등에 비치된 아케이드 게임에서 가정용 콘솔로 주류가 이행되던 시기였기도 하여, 남코 내부에선 쫓기듯이 이 시류를 타지 못하면 낙오됐다라는 위기감이 있었다. 남코의 우려와는 달리 드래곤 크로니클은 무사히 안착했고 그 성공요인으로 분석된 것이 '육성요소'의 탑재였기에, 이는 그대로 차용하되 당시 일본에서 인기를 끌던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얻은 '여자 아이돌'이라는 소재와 결합시킨 것이 바로 아이돌 마스터.[* 구체적인 개발의 모티브로 참고된 것은 [[모닝구 무스메]]며 초기 개발팀 내에선 온라인 대전 배구 게임과 대전 프로레슬링 게임 사이에서 설왕설래가 있었으나 결국 아이돌 물로 제작하는 것으로 굳혀진다.] 2001년 9월 '아이돌 게임(가칭)'이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기획에 착수, 시리즈 초대 프로듀서였던 코야마 준이치로(小山順一郎)[* [[765 프로덕션]]의 1대 사장인 [[타카기 준이치로]]의 이름은 이 사람에게서 따온 것. 2020년 시점 반다이남코 이사를 역임 중이며 2015년 치러졌던 MOIW2015에 간만에 모습을 드러내어 '그 때 아이돌 마스터를 만들길 정말 잘했다'고 감격을 표하기도 했던 인물이다.]와 훗날 총합 디렉터로 10여년간 시리즈를 이끈 [[이시하라 아키히로]]를 중심으로 한 남코 내 개발자들이 머리를 맞대었으며, 여러 부분에서 다소의 시행착오는 있었을지언정 순조롭게 개발이 진행됐다. 기획 단계부터 게임 내 등장 캐릭터들이 춤을 춘다는 것이 주요 세일즈 포인트였던만큼 처음엔 댄스신을 [[셀화]]로 전부 처리하려 시도했으나, 빈약한 예산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사와의 협의가 무산되는 바람에 3D 모델링 외엔 선택지가 남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초기 아이돌 마스터의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쿠보오카 토시유키]]가 선정된 이유도 '[[폴리곤]]이든 [[애니메이션]]이든 선이 적은 그림이 움직이기 쉽다'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또 게임 내 등장하는 플레이어의 화신 및 팬을 가리키는 명칭은 원래 '매니저'로 설정되어 있었으나, 협소한 사전적 의미와 더불어 무엇보다 폼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코야마가 '프로듀서'가 낫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바뀐 경위가 있다.[* 덕분에 이른 시기 녹음을 진행했던 몇몇 성우들은 '매니저'로 녹음을 진행했다가 도중 '프로듀서'로 바뀌자 다시 녹음해야 했다.] 훗날 사무원으로 추가된 [[오토나시 코토리]]의 디자인도 당시 디레3으로 기재된 후카미 와카코가[* 2020년 시점 반다이남코 스튜디오 제3스튜디오 제7프로덕션 콘텐츠 게임 디자이너다.] 공식 블로그에 사용할 캐릭터를 급조하고자 즉흥적으로 그렸던 것이 시초로, 돌이켜 생각하면 여러가지 측면에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가용가능한 자원을 쥐어짜내는 방식으로 하나하나 쌓아올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엔 아직 성우가 캐릭터 송을 적극적으로 부르고 이를 마케팅의 일환으로 삼는 흐름이 옅어, 아이돌 마스터 개발팀조차 담당 성우에게 직접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 맞는 일인가에 대한 고민이 앞섰다. 탑재될 악곡들도 문제였는데 개발팀 내부에서 보컬곡을 만든 경험이 있는 사운드 스태프가 전무하여 사내에 공모 형식으로 이러이러한 게임을 만드는데 곡을 한 번 만들어 볼 사람이 있냐는 주먹구구식으로 인력을 모집해야만 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작곡가들의 경쟁심과 모티베이션은 작동해 자신이 맡은 캐릭터들에게 더 나은 곡을 주겠다고 회사에서 밤을 꼴딱 세우며 곡을 써내려가기도 했다는 듯.[* 훗날 반남을 떠나 [[스즈미야 하루히]], [[러키☆스타/애니메이션|러키☆스타]], [[이야기 시리즈]] 등의 주제가/삽입가를 도맡으며 업계에서 엄청난 명성을 떨친 [[코사키 사토루]]도 이 자리에 있었다.] 결국 개별 악곡 9곡과 테마곡도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가볍기 짝이없는 고민에서 3일만에 탄생한 [[THE IDOLM@STER(곡)|THE IDOLM@STER]]를 더해 총합 10곡이라는 단촐한 구성으로 '''2005년 7월 26일'''[* 솔로 9곡과 테마곡 1개를 CV 9명분 녹음했으므로 90곡. 다만 당시엔 아이돌 마스터가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 'M@STER 버전'으로 불리는 풀버전은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 1절 분량만 수록했다.], 아이돌 마스터의 아케이드판은 비로소 세상에 출시됐다. 전용 마그네틱 카드를 통해 자신만의 아이돌을 육성하고 네트워크 시스템을 통해 다른 유저와 대전하는 시스템은 좋은 반향을 이끌어내며 긍정적인 매출을 기록했고 개발팀 역시 두둑한 보너스를 받을 수 있었다는 후문이었다.[* 남코의 사풍으로 개발의 자유는 보장하되 책임소재가 명확한 것이다. 잘 되면 성과를 얻어가고 안 되면 옷을 벗는다.] 동시에 아케이드 시장에서의 사업에 한계를 느꼈던 반다이남코는 아이돌 마스터를 가정용 콘솔로 이식하기 위해 훗날 총합 프로듀서로 15년이상 시리즈를 대표하는 '사카가미 요조'를 불러 개발에 착수시킨다. 사내에서 다른 작업을 하고 있던 사카가미에게 갑작스러운 호출이 들어와 가보았더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돌 마스터 콘솔판 개발 담당'으로 소개되고 있었다는 모양이다. 당시까지도 아이돌 마스터는 여전히 기반이 빈약한 작품이라 흡사 폭탄돌리기처럼 선임 사원들이 사카가미에게 떠맡기고 뿔뿔히 흩어진 바람에 시간이 흐를수록 개발회의에 참석하는 인원이 줄어 사카가미를 비롯해 몇 명 남지도 않게 됐다. 업무에서 회피할 길이 없었던 사카가미는 아케이드판이 가동 테스트를 겸해 대중들 앞에 시연되고 있을 때마다 현장에 참석해 플레이하는 팬들의 반응을 분석하고 어떠한 요소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판단하며 꾸역꾸역 개발을 진행했다. 그렇게 맞이한 2007년 1월 25일, XBOX360용으로 발매된 아이돌 마스터는 당시 치고는 꽤나 자연스럽고 진보된 그래픽을 선보여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마침 일본의 인터넷 생태계에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로 트렌드를 선도했던 [[니코니코 동화]]에서도 유저 제작 영상 등의 소재로 오르내리며 입소문을 타고 독자적인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게임도 게임이지만 그것을 활용한 2차 창작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희한한 케이스로, 몇 안되는 곡들과 기능만을 가지고 다양한 활용도를 선보인 것이 당시 폭발적인 [[니코마스|유저 창작 콘텐츠]]를 통해 세를 확장하던 니코니코 동화와 절묘한 시너지를 나타냈던 셈이었다. 2020년대까지도 영향력을 잃지 않고 꾸준한 팬덤을 자랑하는 [[동방 프로젝트]], [[VOCALOID]]와 어깨를 나란히 해 [[고산케|세 가문]]으로 불리며 카테고리가 따로 분류될 만큼 세가 컸던지라 지금도 아이돌 마스터의 전성기라고 하면 이 때를 꼽는 이들이 많다.[* 2020년에 접어들어 유튜브 등의 거대 비디오 스트리밍 플랫폼들이 득세하는 시점에도 아이돌 마스터가 꿋꿋하게 니코니코 동화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않는 이유는 우여곡절 많던 흥망성쇄의 역사의 곁에 언제나 니코니코 동화가 함께했기 때문이다.] 2007년 4월, 아이돌 마스터를 활용한 첫 애니메이션화인 [[아이돌 마스터 제노그라시아]]가 방영이 개시되었으나 아이돌 전원의 CV가 교체되고 원래의 캐릭터성과도 꽤나 동떨어진, 생김새만 빌려간 서로다른 별개의 작품과도 같았던 지라 기존의 팬들에겐 크게 어필하진 못했다.[* 당시 미디어 전개에서 CV가 전원 교체되는 것은 흔한 일이였다. 다만 캐릭터와 CV가 밀접하게 연을 맺는 특성은 당시에도 어느정도 발휘되고 있었기에 팬덤은 한 편으로는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애니메이션화 된게 어디냐며 만족하자는 분위기로 정리되었다. 갈려버린 기존 성우들 역시 첫 애니메이션화라는 피상적인 측면에서 축하의 말을 전할 뿐 별다른 아쉬움을 표할 길은 없었다.] 이는 반다이남코의 아이돌 마스터 개발팀과 제노그라시아의 제작을 담당했던 선라이즈 제 8스튜디오와의 의사소통 부족에서 기인된 것으로, XBOX판의 개발에 전념하던 개발팀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들은 상태에서 작품의 기획부터 완성까지 전적으로 일임한 채 일체의 관여를 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애니메이션화에 있어 원작을 제공하는 측은 일종의 갑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작품의 제작에 간섭할 수 있으나, 당시 아이돌 마스터 팀은 그럴만한 입지도 없었고 요구할 처지도 못됐다.] 마찬가지로 선라이즈 역시 아이돌이 등장하는 게임이라는 정도 외엔 별다른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여 완전히 각색한 제노그라시아를 세상에 내놓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진행된 뒤였다. 이 때문에 오히려 원작의 아이돌 마스터를 전혀 모르고 시청한 이들에겐 나름대로 볼만한 작품이였다는 평가를 얻어내기도 했으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아이돌 마스터의 길고긴 역사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2009년 2월 19일 [[PSP]]로 발매된 [[아이돌 마스터 SP]], 동년 9월 17일 [[닌텐도 DS]]로 발매된 [[아이돌 마스터 ds|아이돌 마스터 DS]]까지 아이돌 마스터는 휴대기기로 반경을 넓힌다. 다만 적잖은 이들의 입문작으로 지금도 간혹 언급되는 SP와는 달리, 별개의 프로덕션과 새로운 아이돌 캐릭터를 내세웠던 DS의 경우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DS의 아이돌 역을 맡았던 3명의 신인 성우들은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저명한 인지도의 중견 성우들로 성장했지만, 정작 게임의 제작을 맡았던 디렉터나 프로듀서는 모두 옷을 벗고 반다이남코를 떠났기 때문에 다른 프로젝트에서 가끔 얼굴을 보이는 정도에 그치며 후계 작품을 기대하긴 어려운 시점이다.[* 그 중 [[아키즈키 료]]만큼은 훗날 [[SideM]]을 통해 새로운 활동 영역을 개척하며 복귀에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